세종대왕 오 드 퍼퓸 50ml - 부드러운 우디 향수

** 시향기가 궁금하신 분은 그냥 쭉쭉 내려서 시향기 타이틀 아래부터 봐주세요.

** 향조를 아주 잘 알고 구분해내지는 못해서 그냥 느껴지는 대로 시향기를 씁니다.

 

세종대왕 오 드 퍼퓸 50ml

 

대한민국 조향사가 만든 대한민국 향수

오하니 조향사님이 만드신 세종대왕 오 드 퍼퓸. 한국의 영웅들(Heroes of Korea) 프로젝트의 첫 번째 제품입니다. 저는 '하니날다' 유튜브를 통해 이 분을 처음 알게 됐는데, 최근에 향수를 출시하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줄곧 눈여겨보고 있었어요. 아직까지 국내 퍼퓨머리에서는 향수를 만들어서 판매할 때, 향수 자체에 대한 마케팅은 많이 하지만 누가 조향했는지는 정보가 잘 나와있지 않아요. 그렇지만 해외의 유명한 향수들은 전부 그 조향사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 사람만의 스타일이 묻어나기도 하고요. 그래서 저는 조향사가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브랜드를 좋아하는 편인데, 이 분도 그 중 하나라 한 번쯤 제작하신 향수를 구입해보고 싶었어요. 이번에 그 기회가 되어 구입? 후원? 한 향수가 세종대왕 오 드 퍼퓸입니다.

조향사님은 한국이라는 나라가 잘 알려지지 않던 시절 해외 유학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 때 한국에 대해 소개할 일이 생기면 꼭 지갑에서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서 한국을 이렇게 소개했다고 해요. "세계에서 유일하게 왕이 백성을 사랑해 글자를 만든 나라"라고. 지금도 만 원짜리 한장은 꼭 지갑 속에 넣고 다닌다는 조향사님의 이야기를 보면 거의 세종대왕 덕후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우리나라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이 향수에도 그런 우리나라의 정체성을 입히고 싶었다고 하셨어요. 한지에 한글로 라벨을 만든 것도 다 그 이유에서라고 합니다. 누가 어디서 봐도 이건 한국에서 만든 향수구나, 하고 알 수 있게 만들었다고 해요. 물론...디자인적인 면에서는 좀 아쉬움이 있긴 했어요. 박스 디자인은 컨셉이니 그렇다 쳐도, 폰트만 바꿨어도 좋았을 걸 싶긴 했습니다. 그렇지만 디자인에서 힘을 뺀 만큼 향료에 집중했다고 해서 구매했는데, 저는 진짜 대만족 했어요. 고급 인디안 샌달우드 에센셜을 듬뿍 넣은 오 드 퍼퓸. 향수를 사는데 가격에서 타협을 봐야 한다면 저는 무조건 디자인쪽을 포기하겠습니다.

 

 

 

 

내돈내산 인증. 텀블벅으로 후원한거라 가격이 매우 착합니다.

 

한국의 위인을 기억할 수 있는 향수

또 한 가지 이 향수의 중요한 포인트는, 위인을 기억할 수 있는 향수라는 컨셉입니다. 조향사님은 연예인 향수처럼 유명한 사람을 떠올리게 하는 향수를 보고 한국의 위인을 기억할 수 있는 만들고 싶었다고 해요. 모 연예인이 여행을 갈 때마다 향수를 하나씩 구입한다는 이야기, 많이들 알고 계실 거예요. 향이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주기 때문이죠. 그래서 이 향수는 한국의 위인을 기억할 수 있는 향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고 합니다.

저는 이런, 스토리나 컨셉이 잘 담긴 향수가 특히 좋아요. 사실 그냥 셀링 포인트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저한테 향은 그런 거거든요. 저마다의 고유한 이야기와 기억을 담는 매개체. 같은 향을 맡아도 각자 다 다른 느낌을 받는 건, 사실 각자의 뇌가 그 향에 대해 가진 기억이 다르기 때문이래요. 그래서 향은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고, 사람들은 자신만의 시그니처 향을 갖고 싶어하기도 하죠. 그건 향수가 그냥 단순한 화학분자 물질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저는 그래서 어떤 의미나 이야기가 담겨 있는 향수를 좋아합니다. 

 

 

 

한지 라벨에 한글로 이름을 써 넣은 세종대왕 향수

 

세종대왕 오 드 퍼퓸 시향기

*향 메인 노트: 샌달우드, 베티버
*그 외 향 노트: 앰버, 패츌리, 시더우드

세종대왕 오 드 퍼퓸은 향의 흐름이 변하면서 이어지는 향수가 아니고, 메인노트가 끝까지 쭉 이어지는 향입니다. 샌달우드와 베티버가 메인 노트로 쓰였고, 받쳐주는 향으로 시더우드, 패츌리, 앰버가 쓰였어요.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다 잘 맞았던 향조들이고, 우드 향을 기본적으로 좋아해서 일단 블라인드라도 구매해봤습니다. 솔직히 보통 향수 디스커버리 10ml 살 때도 이거보다 훨씬 비싼데, 이 정도 가격에 본품이라면 블라인드 할 만 하다고 생각했어요.

 

 

 

세종대왕 오 드 퍼퓸을 그냥 아무 정보 없이 맡으면 상상되는 이미지

 

첫 향은 엄청난 우드 향이에요. 저는 샌달우드라고 해서 약간 탐다오 같은 향을 상상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샌달우드향이 바로 딥티크의 탐다오 EDT거든요. 그런데 탐다오랑은 많이 달랐어요. 제가 느끼는 탐다오는 정말 울창하고 나무가 많은 거대한 숲, 햇빛이 거의 들지 않을 정도로 큰 숲에서 자란 나무같습니다. 이파리는 많이 없지만 조금 남아 있는 잎은 약간 색이 짙어서 살짝 달콤한 향이 나고, 습기를 약간 머금어서 만지면 살짝 축축하고 차가운 느낌이 나는 아주 거대한 나무가 떠오르는 향이요. 탐다오를 색으로 나타낸다면 저는 붉은 빛이 아주 살짝 섞이고 검은 색에 가까운, 아주 짙은 갈색으로 표현할 것 같아요.

그런데 세종대왕 오 드 퍼퓸은 좀 더 마른 나무와 풀의 향이 많이 느껴집니다. 탐다오가 어두운 갈색이라면, 세종대왕은 황갈색의 목재의 색깔, 그리고 옅은 노란빛이 도는 풀색의 향입니다. 우드향이 진하게 퍼지면서 같이 확연하게 느껴지는 것은 마른 풀 향이에요. 약간 햇빛이 많이 드는 밝은 숲에, 야생 풀이 이리저리 자라 있고, 이파리가 푸르고 햇빛을 잘 받아 자란 나무에서 나는 듯한 냄새입니다. 탐다오와는 달리 햇빛을 잘 받아서 이 나무는 만졌을때 좀 더 따뜻하고 마른 나무의 느낌이 날 것 같지만 탐다오의 나무보다 키는 작을 것 같아요. 햇빛을 받으려고 높이 클 필요가 없으니까요. 갓 만들어진 목재의 향 같기도 합니다. 왜 집현전에서 이런 향이 날 것 같다고 하는 후기가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어요. 볕 잘 드는 숲 속에 지은 나무 오두막에서 이런 향이 날 것 같거든요.

 

 

 

세종대왕 오 드 퍼퓸에서 느껴지는 목재 향의 이미지

 

잔향은 저에게서는 약간 달달한 목재의 향으로 남았습니다. 포근하면서 약간 달달한 느낌이 들어서 잔향까지 정말 좋았어요. 그래도 탐다오보다는 전체적으로 확실히 덜 달았습니다. 이 향수는 샌달우드의 달달함을 강조했다기보다는 전체적으로 베티버, 패츌리가 함께 받쳐주면서 샌달우드가 느껴지기 때문에 좀 덜 달게 다가와요.
물론 만약 샌달우드나 베티버, 우디향이 아예 취향이 아니시라면 이 향수는 피하셔야 합니다. 샌달우드가 울렁거리거나 머리아프게 느끼시는 분들도 꽤 계신데, 이런 분들은 확실히 힘드실 거예요. 앰버나 패츌리가 있긴 하지만 그 존재감을 느낄 정도로 강하지는 않고, 진짜 샌달우드가 독보적인 존재감을 뽐내거든요.

지속력도 아무래도 오 드 퍼퓸이라 꽤 오래 가는 것 같아요. 저는 자기 전에 뿌리고 잤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맡아보니 은은하게 조금 남아있었거든요. 8시간 정도? 물론 제가 여기저기 돌아다닌 게 아니라 누워있었으니 향이 흩어질 일이 거의 없긴 했는데, 저는 자기 전에 향수 가끔 뿌리는데 아침까지 남아있는 향은 많지 않거든요. 첫향이 그렇게 독하지 않은데에 비해 향 지속력이 좋아서 더 괜찮았습니다. 첫향이 꽤 진하긴 하지만 쨍하거나 코를 치는 느낌은 아니고, 비교적 부드러운 편이에요. 계절은 무더운 여름만 아니라면 다 무난할 것 같습니다.

자연 향을 좋아하는 분, 나무와 풀 같은 느낌의 향을 좋아하는 분, 혹은 너무 강하고 진한 향보다는 좀 더 부드러운 향을 좋아하는 분들이 좋아하실 것 같습니다. 혹은 비싼 향수를 쓰기 부담스러운 분들 중에서 자연이나 나무의 향을 좋아하는 분이 있다면 시도해보셔도 좋을 것 같아요. 저렴한 향수 중에서는 섬유유연제나 비누향, 혹은 프루티, 플로럴 향은 선택지가 다양한 편이지만 우디한 향수는 정말 드물잖아요. 저는 이 가격대에서 이 만한 우디함을 느낄 수 있는 향수는 정말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비추천하는 분들은 일단 우디향 한 번도 접해본 적 없는 사람들! 당황하실 수 있어요ㅋㅋㅋ 이게 뭐야...제사에 쓰는 향 냄새 아니야...? 스님 냄새 아니야...? 할 수 있습니다. 주로 파우더리한 꽃비누향기, 향긋한 꽃향기, 과일 향기, 솜사탕같이 달콤한 향기를 특히 좋아하는 분들이 그럴 것 같아요. 비누와 섬유유연제에서 우리가 흔하게 접할 수 있는 그런 향들만 접해보셨다면 찐 나무 향이나 풀 향이 나는 향수가 굉장히 어색하게 느껴지실 수도 있어요. 혹은 타바코향이나 가죽향처럼 진하고 개성있는 향기를 좋아하는 분들도 크게 매력을 못 느끼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톰포드의 블랙오키드, 톰포드 패뷸러스, 킬리안 백투블랙 등 진하고 존재감 강한 향을 주로 뿌리시는 분들은 비교적 평범하게 느끼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시트러스, 민트, 구어망드 계열을 좋아하는 친구의 후기
시트러스, 민트, 구어망드 계열을 좋아하는 친구의 후기

 

캐주얼하게 입어도, 포멀하게 입어도 잘 어울릴 법한 향이고 남녀노소 성별과 나이를 가리지 않을 것 같은 향입니다. 편안하고 은은한 향이에요. 그래서인지 향수를 아예 안 쓰는 친구도 맡아보고 은은하다면서 좋아했어요. 물론 이 친구의 경우 평소에 나무향이나 자연향을 좋아하긴 했습니다. 향수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향수 냄새가 독하다고 싫어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게 독하게 느껴지는 향이 아니라서 호불호가 심하게 나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다른 친구 한 명은 맡자마자 바로 너무 좋다더니 결제를 했고, 나중에 거의 코 박고 울고 있다며 카톡이 왔습니다ㅋㅋㅋㅋ 친구는 '완성도랑 밀도 모두 있는 향기'라고 했어요. 저도 너무 공감했고요.

 

 

장점과 단점

물론, 여러 향료를 많이 넣고 복잡하게 잘 조합해서 만든 비싼 향수랑 바로 비교를 하자는 건 아니예요. 비싼 향수는 또 그만큼 가치와 매력이 있죠. 값비싼 향료를 가지고 유명한 조향사들이 만들었는데 왜 그렇지 않겠어요.
그렇지만 저는 가격대를 따지지 않고 향이 좋으면 그냥 구입하는 편인데, 합리적인 가격대에서 좋은 향수를 만나면 그 자체만으로도 굉장히 유의미하다고 판단하는 편이에요. 그런 면에서 이 제품은 이 정도 완성도 있는 향수, 무려 오 드 퍼퓸이 이렇게 저렴한데 심지어 우리나라에서 제작된 향수라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어요. 게다가 유명 브랜드를 어설프게 카피하거나, 향은 대충 만들고 포장이나 마케팅만 화려하게 한 향수가 아니라는 점도 좋았습니다. 무엇보다 저는 국내 퍼퓨머리에서 비교적 괜찮은 플로럴 프루티 향은 본 적 있지만, 이렇게 괜찮은 우디 향수는 아직까지 만난 적이 없었어요.

단점은 일단 폰트랑 상자의 디자인..? 향수는 디자인을 보고 수집하는 분들도 꽤 계신데 사실 보기에 예쁘진 않아요. 저는 딱히 향수 병을 모으는 편도 아니고, 다 쓰면 바로바로 버리는 편이라 상관 없지만, 디자인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들에게는 이게 단점으로 느껴질 것 같아요. 그리고 너무 안타깝게도, 시향할 곳이 없어요. 이제 막 출시된 제품이고, 오프라인 매장이 전혀 없는 상황이라 어디 입고된 곳도 없고...시향할 곳이 전혀 없어요......그래서 블라인드로 구매해야 합니다. 혹시 구매를 고민하는 분이 계시다면 제 시향기가 블라인드 구매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다 쓰고 보니까 약간 광고같네요....? 근데 진짜 광고 아니고...업체에서 뭐 받은 거 일체 없거든요....ㅠㅠ 그냥 이 향수 스토리랑 향기 좋은 거 사람들이 다 알았으면 좋겠다......근데 디자인에 쓸 비용과 인력도 없었다는데 홍보에 쓸 비용과 인력은 있을까 싶어서 쓰는 정성 갈아넣은 후기입니다ㅋㅋㅋㅋㅋㅋㅋㅋ 저는 그냥 조향사님이 앞으로도 좋은 향수 많이 만들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이렇게 좋은 가격 좋은 제품 많아져서 국내 향수 시장도 좀 더 활성화됐으면 좋겠고, 향수 좋아하는 사람들 더 많아졌음 좋겠고, 나랑 향수 가지고 수다 떠는 사람 많아졌음 좋겠고 그렇습니다. 향초나 디퓨저 나왔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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